2012-02-23 입사 10개월 차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하는 사회 경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도보출근'과 '구내식당'이라는 결론을 내린 여사원이 되어있다. 뭐하는 회산지도 모르고 들어온 건 미안했지만 수십년 동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계들이 거액으로 팔려나가고 꽤 큰 시장이 자리잡고 있는게 신기했고 두근두근 재밌게 일이 늘었다. 한 6개월 되던 날 부장님이 이런 말을 했다. "왜 2010년도에 들어온 기계 있잖아. 그거 외자야 내자야?" "글쎄, 한번 서류 찾아 볼게요." " 어쭈구리 기억 못해? " " 제가 안해가지고.." "너.. 그때 없었나?" 부장님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한 2년 근무한 사람으로 자주 착각했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도 그랬고 한국에서 각종 서비스직에 뼈가 굵기도 전에 난 일을 잘했다. 눈치가 빨랐다. 상대방이 뭘 하려는지 유심히 지켜 보다가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도와주고 치고 빠졌다! 그리고 다시 사냥감을 물색했다. 정글이다! 이곳은 정글이다! 나는 전생에 하녀였나보다. 그것도 대저택에 상주하는 하녀였나보다. 요즘 보니 설겆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여자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지 진짜 평생 손에 물 안담그고 살던데. 나는 평생 뽀사지게 일하라는 암시인가 봐.
입사와 동시에 시간은 빛처럼 지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를 맹추격하는 1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잠깐 민원처리(각종 부서에서 해달라고 조르는 일들)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이었다. 밥 먹고 양치만 했을 뿐인데 다시 시계는 12시 반을 가르키고 있고, 이제 슬슬 외근 나갈 사람들을 쫒아내고 내 일에 빠져들면 순식간에 5시 반이 된다. 이렇게 회사와 집, 주말엔 병원을 반복하는 사이 절기가 지나고 몇개의 명절을 치루고 그렇게 덥더니, 갑자기 추워져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고 머리도 많이 자랐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일본생활 5년경력답게 앞에서는 잘 웃고(?)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주의로 일관하던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을 향해 계획적인 싸움을 하기도 했다. 숨소리에 '시발'이 섞여 있던 부장님이나 고래고래 소리지르길 좋아하는 사장님. 머리가 나쁜 과장에게 과한 퍼포먼스는 한국 사회에서 꽤 효과적으로 쓰였다. 여기서 배운건 뭐든지 나의 '의견'을 통과 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워야' 얻을 수 있다는 진리. 착하기만 하고 머리가 안 돌아가는 동료보다 싸가지 없어도 일 잘하는게 낫다는 게 내 동료 취향이라는 것.
다른 사람 눈엔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 따박따박 바른말을 뱉고 있으니 기가 찰 것이다. " 너 말 그렇게 밖에 못하겠어??" 하시는데 난 지지 않고 말한다. " 부장님은 시발시발 거리시는데 이정도면 이쁘죠."
사무실이 찬 물을 끼얹은 듯 싸악- 했다. 타자소리가 일순 멈추고 수십명의 남자직원들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부장님! 사무실을 퇴장하면서 게임이 끝났다. 밥을 먹고 나오는 나를 남자직원들 무리가 식당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낚아 챘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눠요ㅠㅠ " 그동안 발길질에 주먹질에 욕지꺼리에 참을 만큼 참고 또 참을려고 했던 남자직원들이 뼛속까지 대리만족을 느꼈던 모양. 한아름 음료수를 양손에 얻어 먹고 여자라서 사회생활 하기 오히려 편한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그부장님은 이후로 누구에게든 욕하면서 일을 시키지 않게 되었다.
저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고, 여자 과장과의 트러블은 몇번 큰소리가 나도 '집안 일'정도로 취급되서 별 상관도 안하더라. 으이구 열받아. 난 과장이고 신입이고 직함이 뭐든 대놓고 불만을 이야기 했다. 이 분 때문에 남아나는 여직원 없었다고.. 있는 동안 만이라도 일하는 스타일을 자리 잡아 놓고 싶었다. 사실 과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메뉴얼도 교육도 없는 불모지와 같은 환경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결국 이사님을 앉혀놓고 여직원들의 실세는 과장님이지만 이 분의 일 하는 내용을 아셔야한다며 고자질에 가까운 보고를 해서 말도 안되는 주먹구구식 스타일을 뜯어 고쳐놨다. 일이 두배로 빨라졌고 쓸데없는 여직원들 야근이 없어졌는데 이게 고자질이라고 욕할 사람있으면 해라. 상관없다.
사장님에게는 '미친척 하는 지랄'이 통할리 없다. 이럴 땐. '눈물'이다. 입사하고 두달? 누구한테랄 것도 없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장님 앞에서 눈물 뚝뚝 흘리며 화 내지말고 저희 얘기 좀 들어봐 주세요... 퍼포먼스 한번 들어 가 준 이후로 사장님은 대놓고 날 이뻐 하셨다. 요즘은 외부 담당자에게 누가 날 소개할때면 "저희 사장님이 총애하시는 직원입니다. 일 잘 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라곤 한다.
초반 러쉬를 끝내고 평화를 찾은 요즘. 어째 신기한 건 그런 지랄맞은 일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사장님을 비롯한 부장님이며 과장님은 나를 가장 좋아라 한다는 것. 남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대개 괴롭힘 당하는걸 좋아한다더니 이건 사실인거야.
처음엔 무역일을 하고 있었다. 수입하는 물건을 통관하고 주문하고. 그리고 기술창구 역할을 했다. 제조사에게 이런저런 질문과 회신을 운반했다. 자신있는 분야가 있다는건 다른 걸 못해도 꿀리지가 않다는 뜻이다. 다들 나처럼 일본어 잘 하는 담당자는 없었다고 했다. 일본 본사도 이렇게 유대관계를 이루어 낸 담당자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가 안돼도 당당했다. 이래서 '전문가'가 되려고 '전문분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나 보다. 영업부에서 넘쳐나는 일을 돕기도 하다가 왠만한 일들을 파악하고 결국 '답답한' 과장의 일들을 야금야금 내가 하게 되었다. 재밌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1억짜리 계약을 따온 남자직원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해맑은 광경! 촌각을 다투어 견적서를 보내고 흐르는 땀을 닦는 시츄에이션! "어디어디 얼마얼마 입금 됐어요!" 경리부에서 들려오는 수금의 소리! 해외 본사의 협조로 빠듯한 납기일을 맞추고 난 뒤의 뿌듯함! 영업의 묘미와 진가도 알게 되고...이 글을 어디서 끝내야 하나..
오늘도 퇴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