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그 날의 기억이 복닥복닥해서 첫 실마리를 끄잡아내는 데도 머뭇머뭇하다. 인천공항 가는 길에 "어 그래 바람이 좀 불긴 부네" 생각은 했다. 불길한 징조는 그때부터 있었는데 나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 날 일을 돌이켜보면 그저.... 케군이 함께 한 비행이여서 다행이다.
PM 15:00
비행시간 직전까지 인천공항을 뛰어다니며 나 홀로 면세품을 쓸어담고 완전 째지는 기분으로 케군과 하루를 만나 탑승을 마쳤다. 이제 오후 3시까지 잠고문 시킨 하루를 내 품에 재우기만 하면 된다. 그날은 아주 작은 비행기였다. 3개 좌석이 두 줄로 배치 된 아시아나였고 나와 케이타는 옆 자리를 확보 못해서 앞뒤로 앉아야했다.
창가 자리인 내 옆에 일본인 부부, 내 바로 뒤 케이타 옆에도 일본인 부부가 한국관광을 끝내고 나리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중년 부부들이어서 하루의 울음소리에 혀라도 찰까 싶어 마음을 졸이며 하루가 울음을 멈추길 속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잠을 이길 장사는 없으니까 곧 내 품에서 잠에 빠진 하루.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승무원에게 베시넷을 달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은 하루를 침대에 재우고, 나는 우아하고 기내식을 먹고 일어난 하루가 찡찡 떼쓰기 시작하면 케군에게 하루를 패스하고 잠시 과자라도 먹는 동안 비행기는 일본에 도착해 있으리라.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베시넷을 앞 쪽에 설치해 주셨다... 그런데... 음? 이건 무슨 상황이지. 농구골대 같은 이 높이는 뭐지...? 11키로 짜리 아기를 덩크슛이라도 하란 말인가. 아기가 들어갈 틈이라곤 겨우 내 주먹 두개가 들어갈 정도였다. 아니 깨우지 않고 어떻게 넣으란거야... 베시넷이아니라 아기엄마에게 빅엿을 주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역시나 하루는 꾸역꾸역 꾸겨넣는 바람에 잠에서 깼고 그 후부터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잠은 안잔다!! 하듯이 울어제꼈다.
나는 항의할 힘도 없었다.. 비행기가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어. 베시넷을 치워달라고 한마디만 하고 다시 하루를 안아들었다. 사실은 기내식도 됐으니 치우라고 합쳐서 두 마디 했다. 온갖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안 멈추는 하루를 달래보지만 땀에 흠뻑 젖어서 괴로움에 엉엉 우는 하루가 불쌍해서 남들 시선 따위 솔직히 신경도 안쓰였다. 아기띠를 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승무원에게 잠시 서서 달래 줄 곳 어디 없겠냐고 했더니 비지니스 클래스를 지나 승무원들 작업공간을 안내받았다.
정말 친절한 승무원 한 분이 "아기가 계속 우네요. 아기가 어디 아파요?" 하고 너무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 분의 친절 때문에 난 참았던 부아가 펌프질 하듯 상승했다. 아프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계획대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있는 애를 어디 아프냐고? 아픈 애 데리고 억지로 비행기 태워 여행이라도 끌고 다니는 부모들로 날 보는 건가. 승무원의 너무 이쁜 얼굴도 다 엄청나게 얄미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울먹이면서 내 품에 재우고 있는 애를 베시넷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높은 곳에 달아 놓고 천정이랑 딱 붙어 있는 바구니에 어떻게 애를 들여놓겠어요. 저 베시넷 14킬로까지 된다면서요 아직 얘는 11키로인데 저기까지 눕힐 수 있는 정도의 동선은 생각하면서 달아놔야죠. 게다가 베시넷 달아 준 직원분 제 배에서 자고 있는 애 깨우지 않고 조심하고 있는 거 보시면 모르시나요? 그 와중에 베시넷 달게 도와달라고 저한테 한 쪽 잡아달라고 하는 건 무슨 센스에요? 한국 가는 비행기 베시넷은 멀쩡했는데 왜 같은 아시아나인데 베시넷 위치가 달라요? 그냥 친절히 물어 본 것 뿐인데 갑자기 닭똥 눈물과 함께 속사포로 쏟아져 나오는 클레임이라니... 아... 심히 당황한 승무원의 표정을 보고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순식간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말들을 토하고 나니 너무 속이 시원해 진 것도 있고, 승무원 생활하는 친구 생각이 나서 내장이 오글거리게 후회스러웠다. 별안간 마구마구 사과했다. 이게 왠 모노드라마인가. 다행히도 굉장한 베테랑이었고 진심으로 날 이해해주었다.
그 후로 케군이 달래보겠다고 하루를 데려가더니 무슨 마법을 썼는지 하루는 아빠 품에서 곤히 잠이들었다! 나는 겨우 제 자리에 앉아 진정을 찾았다. 옆자리의 일본인 부부에게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열심히 미안함을 호소하고 있는 중에 승무원들이 여러명 단체로 모여 와 베시넷 설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고 놀라워했다. "어머! 원래 이 구멍 저 밑에 동그란 부분인데 거기를 납땜으로 막아놓고 저렇게 위에 다시 뚫었네요..." 식사하기가 불편해서 베시넷을 희생시킨 모양이었다. 몰랐다며 정말 죄송하다며 사과해주는 바람에 주변 손님들에게도 약간의 체면이섰다.

PM 18:00
예정 시각 보다 30분 늦어졌지만 나리타 공항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이 좁은 기체에서 해방되는구나하고 어느 때보다도 바퀴를 내리고 나리타 활주로에 일으킬 마찰을 고대하던 그 순간. 비행기는 다시 각도를 바꾸어 아주 가볍게 깃털처럼 부-웅 하고 하늘을 날았다. 내가..내가 꿈을 꾸고 있는게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안에도 좁아터진 아시아나 몸뚱이는 나의 희망을 모두 담은 그 빈약한 발꼬락을 뱃 속에 쏙 집어넣고 더 높이 더 높이 쑥쑥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 젠장할 뭐하는 거지. ;ㅂ;
원인은 강풍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리타 공항이 특히나 바람에 매우 취약하다고 한다. 현수막도 아니고 바람 풍선도 아니고 바람 좀 분다고 이런 막대한 영향을 받고 그래. 오후 5시 이후부터 이착륙이 전면 금지 된 나리타 공항을 떠난 기체는 오갈 곳 없이 하늘을 선회하다가 뭔가 생각난 듯 어딘가를 향해 날았다. 그리고 곧 "나고야 중부 국제공항으로 이동 중입니다" 라는 기장의 아나운스가 들려왔다.
아...아... 맙또사. 일본어 방송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뒤에서 뭐래? 하는 케군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꽤 큰 소리로 대답해버렸다. "나고야로 가고있대! 나고야로 간대!" 일본인으로 가득한 기내가 술렁였다. 머릿속은 온갖 계산으로 숨이 막혔다. 나고야 공항에서 신칸센역까지 30분. 도쿄역까지 2시간... 오늘 안에..집에 갈 수 있을까. 나고야에 호텔을 잡을까?
그래, 이왕 나고야로 향하는데 밥이나 달래야겠다. 난 혼자 못 먹은 기내식을 (돌이켜 보면 몹시 적당한 시간에) 먹게 되었다.

PM 20:00
시커먼 밤 공기에 둘러 싼 나고야 공항에 도착했다. 나리타 뿐만 아니라 하네다공항에서도 거절당한 온갖 비행기들이 속속 나고야 공항으로 밀려들어왔다. 바깥을 보니 직원들 양복 넥타이가 떨어져나갈듯 휘날리고 있었다. 여기도 상당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배도 든든해졌겠다. 매우 이성적이 된 나는 내려서... 하루 옷을 하나 더 입혀야지.. 머릿속으로 침착하게 앞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하루는 어느새 자고 일어나 5시간 함께 한 주변 승객들과 친해지고 이젠 애교부리며 제 집처럼 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고야에서부터 하루는 최고로 신나했다. 아기들의 기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 혹시 몰라서 챙겨 온 이유식은 제대로 쓰여졌다. 내 모노 드라마로 급 친해진 승무원 언니가 기내식 빵을 두개 주셨다. 이유식과 함께 든든히 저녁을 먹일 수 있었다. 몰래 비지니스 승객을 위한 넛츠 믹스도 두 봉지나 주셨다. 베시넷 사건은 땅콩과 함께 모두 잊혀졌다.
이제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리면 될 줄 알았는데 비행기 급유와 이륙 수속을 밟으면 우리는 다시 나리타로 출발한다는 거였다. 우리라니!! 우리라니!!! 기장 너만 가!!!! 날 내려달라!!!!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이륙과 착륙을 반복해서 에어컨은 꺼졌다 켜졌다 기내는 덥고, 몇 개없는 화장실에 사람은 계속 줄을 서고 있고 기내식 한 끼가 전부였던 모두가 서서히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대각선 뒷쪽 젊은 여자는 구토를 했다. 아기를 데리고 탄 것도 악재이지만 임신 중에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재앙이라 생각했다.
PM 21:00
한 시간의 급유와 수속과 검역을 끝내고 또 다시 나리타로 향했다. 규칙상 그 날 안에 예정 된 공항으로 돌아 올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단다. 그래 시간이 연착되는게 낫지-라고 자기암시를 하며 나를 달래기로 했다.

PM 22:00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나리타에 도착했다. 영국 갔다 왔니. 7시간 비행이 다 뭐람. 괜찮아. 스카이라이너를 타고 금방 집에 도착할거야-의 생각은 30분 후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반성해야했다.

일단,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단 한 장 남은 기저귀를 갈아줬다. 7시간을 차고 있었네 ;ㅁ; 가여워라. 그제야 눈 앞에 엄청난 인파들이 보였다. 이게 왠 재난이야... 에스컬레이터를 멈추고 윗 층까지 줄이 이어져있었다. 수 많은 비행기가 나고야 공항을 갔다가 다시 나리타로 몰려 온 것이다. 그리고 출입국 심사 앞으로 모두가 '빨리 이 곳을 벗어나자'는 한 마음이 되서 모여든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따윈 없다. 아기 안고 있다고 봐주기 없다. 유모차 타고 있는 하루 정도는 양반이었다. 목도 못 가누는 젖먹이를 매고 있는 엄마며, 난 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이미 비행기를 3번 갈아타고 온 애 엄마도 있었는데 남편없이 무려 아이가 세명이었다. 애저녘에 한계를 넘어선 아이들이 울며불며 엄마에게 더이상 못 서 있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양보할 여유가 없었다..
PM 23:00
겨우 출입국 심사를 빠져나온 나는 전철에 몸을 실으면 될 줄 알았다. 너무 졸려서 판단 능력이 없어지고 있기도 했다. 케군은 반 미친 얼굴로 웃으며 내게 현실을 말했다. 일요일이라 방금 전철이 끊겼대. 어? 응? 여긴 인천이 아니다. 구닥다리 나리타다. 버스따윈 없다. 전철보다 버스가 훨씬 미리 영업이 끝난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우리 완전 망한거다. 택시있는 곳으로 허둥지둥 가 봤다.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스텝말로는 새벽 5시 정도에 탈 수 있을거라 했다. 머리가 띵했다. 부리나케 호텔에 전화를 돌렸다. 단체 손님을 책임 진 여행사들이 싸그리 확보한 뒤였다. 방이 있다 한들 거기까지 갈 셔틀버스가 없는 호텔뿐이었다.

공항 로비에 사람들로 꽉찼다. 젊은 여행자들은 무전여행이라도 하듯 음악을 들으며 그냥 있던 자리에 주저 앉았다. 공항직원이 비스켓과 물, 에어매트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아침까지 여기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제 남은 기저귀가 없는데...

나리타 공항 4층 쇼핑몰에 위치한 조용한 수유실을 점령했다. 아이폰에 충전기를 꽂았다. 마지막 남은 분유를 싹싹 모아 하루를 먹였다. 주머니에서 승무원에게 받은 넛츠믹스를 발견해 케군이랑 나눠먹었다. 케군은 인천에서 올 때 먹은 기내식 뿐이어서 심하게 배고파했다. 그치만 망할 나리타엔 편의점이 심야에는 문을 닫았다. 어이없네. 편의점이야 공무원이야. 인천공항이 얼마나 완벽한 공항인지 뼈저리게 비교되었다.

아! 맞다! 한국에서 사 온 쌀눈 가득 곡물 과자를 생각해냈다. 귀중한 유기농 과자를 케군에게 보급했다. 배고픔, 피곤함과 싸우다가 내일 아침엔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PM 24:00
케군이 내일 회사가야 한다는 핑계를 무기삼아 마지막 비책이던 시압쥐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 큰 아들이 집에 못 가고 있다고 전화하는 건 자존심 상했던 거다. 마지막까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다가 큰 결심을 해줬다.
아버님은 아직도 공항이냐며 정말 놀라셨다. 아버님은 자식을 믿는 분이시다. 그 어떤 요구가 있어도 묻지 않고 응해주신다. 그것은 충분히 고심하고 내린 결론이란 걸 믿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케군이 그런 아들이어서 너무 자랑스러웠다.
아버님은 무려 도쿄 한복판에서 심야할증이 붙은 택시를 쏘아 나리타로 달려주셨다. 늘 저녁식사와 함께 맥주나 와인을 즐기시기때문에 운전 할 수 없었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나리타공항에 영업을 올 수 있는 택시는 정해진 회사에 정해진 수량만 가능했다. 그러니 인천공항과는 다르게 아침까지 택시가 없었던 것이다. (뭐 이딴 룰이 다 있나 싶었다.) 반대로 손님을 태우고 공항에 오는 건 당연히 가능했던 것.
AM 1:00
아버님이 탄 택시가 도착했다. 분명히 예약이라고 간판도 깜빡이고 사람도 타고 있는데 택시가 들어오자마자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좀비처럼 몰려들었다. 아버님은 진짜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눈 앞에 광경에 압도되서 나도 모르게 택시를 뺏길까봐 아버님!! 아버님!!! 손을 흔들며 헐레벌떡 뛰었다. 우리 가족의 살 길은 저것뿌니니까!!!
그때까지도 하루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공항을 기어다니며 놀았다...아주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택시에 타자마자 내 무릎에 고개를 떨구더니 하루는 작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꿈 꾸고 있었던게 맞았나보다.
AM 2:00
드디어..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잠 든 하루를 그대로 방에 옮겼고, 우리는 기절했다. 아버님은 그대로 택시를 타고 댁으로 향하셨고 요금은 아버님 노후에 효도하는 걸로 외상을 달았다. (우리 비행기 왕복 값보다 더 많이 나왔다....)
지옥같은 플라이트가 끝났다. 바람이 부는 건 공항측도 항공사측에도 아무 잘못이 없기 때문에 이번 일에 의해 받은 모든 피해는 개인의 몫이라고 한다. 아무튼 수 없이 일본과 한국을 오갔지만 이런 걸 하필 아이와 처음 겪다니 운이 참 없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이라고 하면 비행기 안에서 몇끼를 해결해야 할 지 모르니까 아기 음식이나 어른의 비상 식량은 꼭 챙겨가자. 그리고 기저귀는 넉넉히. 또 연착이 되면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 핸드폰을 풀가동해서 이동경로나 숙소를 미리미리 확보할 것. 여엉부영하다가는 출입국 심사 도중에 이미 게임은 끝나있다.
참, 밤 12시경에 수유실에서 아버님을 기다리며 깨달은 건데 30만원어치 신나게 쇼핑한 면세품을 아시아나 비행기위에 두고 내렸었다. 허허허허허.
너무 황당한 일들의 연속이여서 이런 것 쯤 웃어넘길 수 있었다.
PS. 분실물 센터에 전화해서 5일 후엔 택배로 잘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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