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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

2013-05-29 미츠코 이야기 - 청년시절 편

by Previous Dong히 2024. 12. 26.

미츠코는 1923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언니와 미츠코 자매는 정규교육을 받으며 평화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동그랗고 큰 눈매와 또렸한 코 다무진 입매에 지금 보아도 세련된 얼굴을 한 당차고 활달한 여자아이였다. 선생님의 부탁으로 모델을 선 그림이 어딘가에 수상한 적도 있었고 이웃나라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온 무용가의 공연을 마을극장에서 구경하기도 했다. (미츠코는 80년전의 그 무용수의 이름을 기억했다. 한국 현대무용의 선구자 20세기를 빛낸 역사적 인물 최승희였다.) 친구도 많았고 세상은 평화로웠고 기회는 넘쳤다. 

 

미츠코가 소장하고 있던 고 최승희씨의 당시 사진.

 

교사가 되기 위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여자였지만 미츠코의 부모는 학업에 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전문교육을 마치고 실습과정으로 1년간 교생기간을 보내기 위해 같은 과정을 배우는 언니와 함께 대만에 건너갔다. 일본은 차례로 주변 아시아 국가를 침략 중이었고 조선을 비롯한 대만 등은 일본령이었다. 미츠코는 소학교 3학년 학급의 담임을 맡았다. 일본어로 생활지도를 하고 일본어로 교과 과정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항상 에너지 넘치는 미츠코를 잘 따랐다. 

실습이 끝나고 정식교사가 되었지만 늘 윤리적이고 솔선해야하는 규범적 생활과 본래의 성격간에 갈등이 일었다. 답답함을 느낀 미츠코는 교사로서의 미래를 그릴 수가 없었다.  미츠코와는 달리 가르치는데에 큰 보람을 느끼는 언니는 교사로 남았다. 미츠코는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하고 친구가 있는 만주로 향했다. 만주도 국경없는 일본령이었다. 친구와 함께 만주 항공에 취직을 했다. '에어걸'이라는 직업으로 불리웠다. 서양풍의 제복을 입고 짧은 머리에 퍼머도 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모던걸이었다. 프로펠러가 두개 돌아가는, 지금의 여객기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지만 그래도 정원을 채우면 20명 정도 탑승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여자가 비행기를 타는 직업으론 에어 걸이 유일했다. 

 

 

 

한 번 비행을 나갈 때마다 2명 정도의 에어걸이 승객과 함께 탑승했다. 만주 항공의 직원은 약 서른명 정도로 에어걸은 고작 5명에 불과했다. 기내식이란게 없던 시절이라 미츠코는 홍차를 따르고 사과가 있으면 사과를 깎아 내 갔다. 에어걸이 되기 위한 입사시험도 있었는데 교사는 최고의 엘리트였던 시대기 때문에 전직이 '교사'였다는 한 마디에 바로 합격이 결정되었다.  교사 자격을 갖추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눈에 띄는 얼굴에 큰 키, 생기 있는 스무살의 미츠코는 귀빈의 비행에 항상 대동되었다. 
고위 장군님의 전세기에 동승해서 만주를 출발해 홋카이도에 장군을 내려주고 그 길로 돌아온 날이었다.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전쟁이 터졌다는 전보를 받았다. 일반 여객기의 비행은 금지 되었고 모든 비행기는 군수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여자는 비행기에서 할 일이 없으니 본국으로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에어걸은 10개월만에 그만두어야했다. 대만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언니도 본국으로 귀국명령을 받았다. 
에어걸을 그만 둔 일보다 전쟁이 일어 난 일보다 가장 싫었던 것은 돌아가면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사를 치뤄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피해보고 싶어서 오키나와에서 대만으로 대만에서 만주로 개구리처럼 튀어다녔지만 결국 부모의 손바닥 안 이었던 듯 무력감이 쏟아졌다. 미츠코는 잘 알지도 못하는 13살 위인 남자와 결혼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1600킬로 떨어진 고베에 시집을 갔다. 
 
미츠코의 모,미츠코, 미츠코의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