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들어 처음 보는 눈이다.
작년에는 2월 초에 펑펑 눈이 쏟아졌었다. 그게 그 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눈이었다. 참 보기드믄 눈이다. 사실 처음엔 아주 무거운 눈이 와서 비인지 눈인지 헷갈렸다.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는 손님 발 길이 뚝 끊겼다. 눈은 거세지고 큼직해졌다.
10시 반 쯤이었나? 예정시간보다 훨씬 일찍 마무리를 하고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바로 대각선 앞에 보이는 집으로 달려가 비닐백을 집어들어 욕실에 있는 물건을 던져 담았다. 지갑에 있는 동전을 털었더니, 90엔이 모자랐다. 자잘한 잔돈을 모아두는 저금통에서 1엔과 5엔짜리를 헤쳐서 10짜리만 바쁘게 걸러 110엔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현관을 요란스럽게 닫고 다른 쪽 대각선 앞에 있는 목욕탕으로 뛰었다. 눈은 점점 풍만해져서 지면에 닿는 속도도 느려져있었다.
목욕탕 아줌마에게420엔을 내밀고 짧은 사물함 열쇠를 받았다. 이자카야 공기가 쩌들은 옷이 기름 냄새, 담배 냄새를 풍겨서 체면차릴 틈도 없이 마구 벗어 제꼈다. 사물함 열쇠에 달린 고무줄로 머리를 다발짓고 욕탕 문을 열었다. 뒤에서 호랑이에게 떡이라도 요구당한 사람처럼 양치하고 세안하고 몸을 씻고 샴푸를 했다. 마지막으로 트리트먼트를 머리카락에 세심히 주물러 묻히고 다시 사물함 열쇠로 젖은 머리를 모아 올려 묶었다. 10분이 지나있었다. 드디어,드디어, 라는 기분을 살포시 누르며 노천탕 문을 밀었다.
다행히 좁은 노천욕탕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승리에 가까운 회심의 미소를 가득 머금고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목욕탕에서 비치해 둔 핑크색 꽃무늬 우산을 펼쳤다. 영하의 날씨에 벌거벗은 채 목까지 따뜻한 탕에 몸을 담그고 눈을 보고있었다. 눈 앞이 욕탕 물과 바깥 공기의 온도 차로 드라이아이스처럼 자욱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래, 아마 천국이란 이런 곳 일거다. 천국은 1년 내내 눈이 오고 우리는 모두가 벌거벗었지만 수치스럽지 않다. 또, 모두가 함께 눈을 맞으며 온천에 몸을 담근다. 정우성도 조인성도 함께. (아.. 그럼 정우성, 조인성은 지옥에 간 건가?)
집에서 챙겨 온 파자마를 입고 남은 20엔을 드라이어기계에 넣었다. 잘 마른 살랑살랑해 진 머리카락을 몇번이고 만지면서 무심코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 좋은 날을 망쳐선 안되지. 지금 본 건 빨리 잊어야지. 집에 오자마자 파스타면을 삶아서 버섯이 들어간 일본식 소스를 넣고 볶았다. 제일 위에 '미즈나'를 썰어 얹었다. 목욕으로 소모 된 체력이 순신간에 충전됬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파스타를 먹은 걸 보니 잊자고 했던일은 새까맣게 잊혀진 것 같다. 베란다 너머로 아직 눈이 작정하고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옥수수차를 찔끔찔끔 마셨다.
아 - 너무 좋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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